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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F 2019 ARTWORK

한국여성아트페어KWAF, 두번째,
『고개를 들라, 이 많은 유디트들아』

한국여성아트페어Korea Woman Art Fair는 한 사람의 힘으로 기획되고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응원 속에서 올해 다시금 열리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여성, 유디트, 그리고 젠틸레스키

 

여성으로 읽혀왔거나 여성으로 살아온 작가들이 참여하여, '살아남은 여성'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를 떠올리며, 생존자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전달합니다.

참여 작가와 작품 소개

서문과 작가, 작품 소개 글 : 민경

서문 : 『고개를 들라, 이 많은 유디트들아』

애끓게 허공에 울려 퍼지던 생존자의 부름에 응하여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였다. 기존의 정상성 규범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남은 열여섯 몸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폭력적인 사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열여섯 여성들. 살아남은 숨을 날카롭게 내쉬며 모든 이분법적 경계의 목을 자르는 열여섯 유디트들. 이들은 남성이 차지해온 미술의 역사를 비집고 들어가 남성의 이름으로 쌓아올려진 역사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오늘도 갤러리에 발을 디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도시를 구한 유디트처럼, 남성에게 빼앗긴 예술의 현장을 되찾기 위해 오늘도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든다.

강철

강철 작가는 소외되고 타자화된 이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가장 공적인 영역으로 불러들인다. <허복연 할머니 글씨>에서 작가는 외조모에게 당신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지시한다. 정확한 문장으로 완성되지 않은 서툰 글씨들. 맞춤법이 잦게 틀리고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정규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일제 강점기 세대 여성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사투리와 옛말이 섞인 외조모의 서툰 글 밑에 현대 표준어로 번역문을 작성한다. 세로쓰기로 작성된 외조모의 거친 글씨와 그 밑에 가로쓰기로 작성된 작가의 단정한 글씨는 두 세대를 건너 쓰는 법과 말씨, 교육수준마저도 변화한 사회를 보여줌과 동시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쓰는 자와 번역하는 자로서의 여성들의 연대를 드러낸다. 작가는 그렇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일제 강점기 생존 여성의 이야기를, 거창할 것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갤러리의 흰 벽 위에 가득 채운다. 두 세대가 지나도록 바뀌지 않은 기혼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화된 폭력들,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던 폭력들은 당사자의 손으로 쓰이고 또 다른 당사자의 손으로 갈무리되어 관람객을 마주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는가, 또 어떤 것인가.

 

김도아

김도아 작가는 스스로 숨을 이어온 흔적을 그려낸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차가운 도시 속에서, 가장 가까운 타인인 부모에게 끊임없이 잊히고 버려지며 죽음과 맞닿아왔던 삶.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것을 찾아 도망쳐야했던 기록을 남긴다. 자신의 공간, 자신의 무리, 자신의 사람, 자신의 것. 그 어디에도 나의 것은 없었다. 작가는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의 생존을 좇아 헤매다 익숙해져버린 낯선 공간들의 생경함과 결국 만들지 못한 자신의 것을 온몸으로 기억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거쳐 온 풍경들을 지워낸다. 자신에게 무심했던 공간들을 무심하게 삭제한다. 스스로 도망쳐야했던 시간만큼, 자신이 안정할 수 없던 세월만큼 캔버스는 검은빛으로 잠긴다. 공허한 허공 속에 자신을 세운다. 낯선 공간 속에서 시리도록 단단하고 허무할 정도로 우뚝 서있어야 했던 자신을, 그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질척하고 깊은 공허 속에 물들어 동화되어야 했던 자신을. 오늘도 살을 에어 낼 듯이 무심한 하루를 당연하지 않게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오늘도 캔버스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린다.

 

김래곤

김래곤 작가는 동식물을 오브제로 삼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패턴화해 화면에 옮긴다. 짧고 가늘게 그려진 선들과 작게 찍힌 점들은 그 자체로는 고요히 숨죽이고 있으며 한없이 작다. 어떠한 색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검은색으로만 채워진 그들은 그 혼자서는 어떠한 감정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들과 점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하나의 패턴이 되어 거대한 유기체로 기능할 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조용히 웅크린 작은 선들이 아닌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는 거대한 매 한 마리이다. 고요한 말들이 모여 커다란 외침이 되었고, 그 외침이 날개를 달아 하늘을 활공한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거대한 울음소리를 내고, 모두가 우러러볼 그런 드넓은 날개를 펼친다. 작가는 더 많은 여성의 말들이 모이길 바란다. 그래서 더욱 커다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서이

시간이 흘러 머리카락이 자라 죽은 세포 덩어리로 굳어지고 메마른 얼굴에 금이 가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여성들이 있다. 인디언 속담 중에 ‘사람의 머리카락에는 추억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다.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들의 집합소로, 길러지는 동안의 모든 세포 정보들을 그 안에 고스란히 담는다. 신체의 가장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기억하며 시간과 함께 자라나는 머리카락. 김서이 작가는 그 머리카락의 표현에 집중하며 두상을 조각한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인물의 머리카락은 감정에 맞추어 그 물성과 색감이 변화한다. 두상으로 조각되어 포즈와 제스처를 취할 몸을 잃은 인물은 오로지 표정과 머리카락으로만 말을 건넨다. 당신은 지금 어떤 표정으로 어떤 머리카락으로 나를 바라보는가. 어떤 감정이 지금 당신의 머리카락과 함께 누적되고 있는가.

 

김영우

김영우 작가는 캔버스 위에 작가의 도구이자 무기인 붓을 박아 넣었다. 보라색으로 물든 캔버스 위에 유난히 검붉은 붓이 놓였던 자리. 캔버스 위에 쏟아진 감정과 에너지 밑에 숨겨진 한 차례의 휴식의 흔적. ‘그리기’라는 예술적 노동이 지나간 이후 작가는 자신의 손의 연장선처럼 다루던 페인트 붓을 화폭에 건다. 붓의 그림자처럼 놓인, 미처 칠하지 않은 그 흔적까지도 당당하고 자유롭게 캔버스에 놓였다. 예술가에게 창작의 노동과 작품의 반복적이고 꾸준한 생산이 강요되는 세태를 작가는 거부한다. 대신, 창작 하지 않은 창작의 열려있는 힘과 휴식의 흔적이 남긴 무한한 자유의 에너지를 벽에 건다. 기계적인 완벽을 탐하는 대신에 자유를 갈망하고 틈을 내어준다. 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 넘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도록, 또 보는 자들의 생명력이 그 틈새에 자연스럽게 스밀 수 있도록.

 

김현진

김현진 작가는 소수자,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정상성 규범의 사회에 내는 균열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다. 증언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사건들. 작가는 생존자가 남긴  이야기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올린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만난 사건들은 새로운 파장을 일으킨다. 작가는 오직 기록하고 발화하는 자에서 멈추지 않고 사건과 사회 사이의 중간 매개자, 전달하고 퍼뜨리는 자의 역할을 동시에 행한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굳어진 세계에 돌을 던져 균열을 낸다. 마치 물수제비 하듯, 연이은 파장을 만들어내며.

 

누림

누림 작가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그린다. 왜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왕자님이거나 영웅이어야 하는가? 왜 모든 주인공들은 아름다워야 하는가? 작가는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는 남성영웅서사를 거부한다. 대신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로부터 서사를 끌어낸다. 남성을 위해 악역을 맡아야만 했던 마녀들, 남성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남성이 만들어낸 죄목으로 지옥에 간 여성, 꽃이어야 했던 사람과 가시를 가진 사람의 아픔 등.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 무대를 올린다. ‘남성 아닌 것’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 남성중심적인 세상에서 탈출해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며 만들어낸 세계,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세계. 작가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그 세계를 넓혀가며 다양한 주인공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디디롱스타킹

디디롱스타킹 작가는 사회에 팽배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인형에 빗대어 화면 위에 옮긴다. 오직 겉모습만을 보면서 팔과 다리, 가슴과 허리 등 몸의 모든 부분을 나누어 품평하고 훑어보는 시선들에 작가는 구체관절인형처럼 조각난 채 방황한다. 비현실적으로 표현된 쨍한 원색과 은색의 배경 위에서, 인형의 몸은 분리된 채 허공에 부유한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 속에 물건처럼 존재하는 현실은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무한가. 타인의 시선은 얼마나 잔인하게 나의 피부와 뇌리에 꽂히는가. 타인을, 또 스스로를 평가하는 사회에 갇힌 여성들은 스스로 위축되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시도하고, 그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사회적 기준이라는 거푸집 속으로 내몬다. 여성은 인형처럼 만들어지고, 평가되고, 또 조각조각 부수어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새롭게 공개되는 디디롱스타킹 작가의 신작 네 점은 타인에 의해 신체가 대상화되고, 스스로를 타인의 기준에 맞춰 검열하던 끝에 인형과 꽃으로 지칭되던 삶에서 탈피하여 스스로로 살아가는 삶을 꿈꾸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레레

가해자의 언어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생존자들은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생존자들의 언어는 입 막히고 무뎌지며 뭉개졌고 시끄럽고 폭력적인 현실로부터 상처입고 조각나 그 형체를 잃었다. 레레 작가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가해자의 언어와 행위를 동시에 경험하는 역설을 화면으로 옮긴다. 차마 고개 돌려 외면할 수 없는 참담한 기억들을 이어 붙여 그로데스크한 풍경을 만든다. 지적되고 반박되지 못한 채 ‘아멘’이란 말로 뭉뚱그려진 언어의 조각들은 쌓여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높아져 바벨탑이, 또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샬롬> 연작에서 작가는 가해자의 언어들을 가슴 속에서 썩히며 부식된 흔적으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괴물로 형상화해 끄집어낸다. 작가는 목사의 입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 가해자의 언어를, 평안과 사랑의 공동체를 목표로 하면서도 일어나는 일상적인 죄악을 바벨탑과 괴물로 비유하며 은혜롭고 경건하게 녹슬어가는 신앙공동체의 비극적 결말을 기대한다. 생존자들을 짓밟는 모든 말들과 그 모든 타락을 행위하는 이들이 썩어 문드러지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조금은 무기력한 푸른빛으로 붉게 녹슨 죄악을 쌓으며, 이를 바라보는 당신들에게 이야기한다. 혼자 외로웠을 생존자에게 말을 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민경

이란격석以卵擊石.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일컫는 말이다. 아주 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때린다는 우습고 허탈한 행동. 그러나 그것은 과연 정말로 무의미한 일인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회적 규범들 앞에서 약자로 규정지어지는 우리는 그 자체로 절망한 채 정지해야 하는가? 민경 작가는 13분 34초의 긴 시간동안 거대한 바위에 수없이 많은 계란들을 던져 깨뜨린다. 작가는 말로 전해오던 속담을 실제로 행한 뒤 그 결과를 전시하며 그 편견을 뒤집고자 한다. 살아있는 작고 약한 것들의 역사가 누적될 때, 크고 견고한 것들은 뒤바뀐다. 시간이 누적되고 숨이 거칠어지는 동안, 작고 약한 몸들은 바위에 부딪혀 소리를 내고 끈적한 흔적들이 바위를 뒤덮는다. 계란들은 바위를 아주 깨뜨릴 수는 없어도, 그 표면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아주 많은 계란들이 오랜 시간 깨져나간 결과로, 바위는 변화한다. 작가는 묻는다. 이 모든 행위와 흔적들은 정말로 무의미한가? 생존한 우리들의 외침은, 이토록 유의미하지 않은가?

 

보복과 궤욕

김다미, 최은옥, 한수연의 3인으로 구성된 여성주의 자전만화 그룹 <보복과 궤욕>은 누군가의 ‘여자친구’로 살아온 시간들을 지나 서로 연대하고 동고동락하며 3년을 공유한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그들은 듣지 못했던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해자들의 가해 사실을 직시했다.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성의 연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개인이 고스란히 받아야했던 비일상적인 일상의 폭력적인 시간들 이후 피해당사자들은 어떻게 생존의 하루들을 살아왔는가. 가해자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것들을 미화할 때 생존자들은 홀로 견뎌야만 했던 시간들을 어떻게 지내왔는가. 팀 <보복과 궤욕>은 생존당사자들로서 피해 그 이후의 삶을 조명한다. 세 작가는 입을 모아 발화한다. 한 몸처럼 붙어 동시에 혼잣말을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때때로 직접적이고 또 적나라하게 들린다. 그들의 이야기는 종종 허공에 공허하게 부유하고, 가끔은 발에 채일 정도로 낮게 웅성거려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 언뜻언뜻 들리는 그 목소리들에는 손이 쉬이 닿지 않아 사람들은 그 전부를 듣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 세 작가가 손으로 외치는 혼잣말들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당신 친구들의 이야기이고, 당신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세 작가가, 살아있는 혼잣말들에게 혼잣말로 말을 건다.

 

슬리키 박

슬리키 박 작가의 작업은 성(性)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태도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개인이 사회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사회는 여성의 성에 관한 욕망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규범과 금기라는 이름으로 제약해왔고, 따라서 성은 언제나 사회성을 지닌다. 사회로부터의 인정욕구와 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동전의 양면 사이에서 방황하던 작가는 <젖은 단서> 연작에서 ‘은유와 상징’이라는 받침돌을 이용해 동전을 옆면으로 세워버리기에 이른다. 작가는 성적인 메타포를 이용해 화면을 구성함으로 사회의 부정적 반응과 스스로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유머러스한 상상력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은밀하게 발산한다. 신체와 오브제가 뒤섞이고, 비인간 동물과 인간이 섞여 만들어진 비정형적이고 불편한 이미지들은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모든 규율과 경계들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허물어진 틈새에서 작가는 금기 위반의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관객들이 그 틈새를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단단하게 사회에 자리 잡아 여성에게 강요되는 성 엄숙주의. 그것에 은밀하게 저항하면서.

 

윤선

윤선 작가는 화면 속에 스스로의 도피처를 만든다. <before shelter> 연작은 여성으로 현대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불안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인의 시선과 몰래카메라 등의 시각적 범주로부터 크게는 뉴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혐오범죄의 물리적 범주까지, 한국사회의 여성들은 수많은 잠재적 위험 속에 놓여있다. 셀수없이 많은 위협의 간접경험들은 정신적 내상을 입혀왔고, 작가는 결국 현실에서 적절한 안식처를 마련하지 못했다. 아직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언제든 나에게도 실질적인 피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작가는 스스로 구축한 심리적인 공간으로 도주한다. 작가는 현실의 공간을 캔버스 위에 얼기설기 엮어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도주로를 만들며 계속해서 다른 공간을 만들어냈다. 불안한 현실과 외부의 폭력적인 자극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고 생존할 수 있는 도피처를,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연속적이며 최소한의 자기방어가 가능한 안전한 도피처를.

 

이희주

이희주 작가는 여성의 외모에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적인 언어들을 뒤집는다. 그리고 외모차별적인 언어들이 팽배한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회를, 여성의 몸을 끝없이 대상화하고 물상화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작가는 외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경험한 남성주의적 언어폭력들을 모티브로, 캔버스 위에 직설적인 시각 언어를 사용해 발화한다. 외국에서는 여성의 몸에 과일과 채소를 빗대어 비하하는 표현이 존재한다. 작가는 그 언어적 표현들에 의문을 던진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몸 그 자체로, 과일은 과일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없는가? 작가는 비하언어에 사용되는 은유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불완전한 신체를 가진 둥근 과일을, 채소를 종이 위에 그려낸다.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신체를 어떠한 포장지도 없이 그 자체로 종이 위에 옮기고, 갤러리라는 가장 공적인 공간에 전시한다. 과일의 이름으로 비하되던 나는 온전히 나 자체로, 당신들의 비하하는 그 자체의 모습으로도, 꾸미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외친다. 그렇게 가해자의 언어를 빼앗아 작가 스스로의 것으로 만든다.

 

주인

주인 작가는 여성이 주가 되는 서사가 오직 ‘여성 영화’라는 이름하에 묶이는 세태를 비판하며 영화계의 안팎에 여성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 남성중심적인 서사가 팽배한, 남성연대로 가득한 영화계의 흐름을 뒤틀고 들어간 작가는 그 편협하고 차별적인 세계 위에 퀴어와 여성의 세계를 끄집어내 덧씌운다. ‘냉장고 안의 여자’라는 말이 있다. 남성 캐릭터의 개인 서사와 각성을 위하여 ‘시체’역으로 소비되어오던 여성 캐릭터들을 일컫는 말이다. 작가는 그 말을 노골적으로 비틀어 전시한다. 작가의 카메라 앵글 속에서 더 이상 여성 캐릭터는 냉장고 속에 위치하지 않는다. 이제 시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시각적 자극과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위한 몸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남성이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가 뒤바뀐 화면 속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생경함과 아무도 만들어주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통쾌함이다. 작가의 화면 속에는 그간 존재하지 않던,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세계가 존재한다.

 

한솔비

한국사회의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심각한 성별 임금 격차는 아동권도, 양육자의 노동권도 확보하지 못했다. 여성들 개인에게 떠안겨진 돌봄, 가사, 간병 등의 ‘무급’ 가사노동은 여성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일상화되었고, ‘집안일’이라는 이름하에 가치 절하되었다. 한솔비 작가는 유년기에 접한 애니메이션의 입을 빌려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한다. 작가는 초능력 소녀들이 등장하는 만화 ‘파워 퍼프 걸’을 패러디해 ‘파워 후ㅡ리랜서즈’라는 여성 초능력자 그룹을 재창조한다. 이들은 여타 초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악당들을 무찌르며 도시를 수호하지만, 초능력자 이전에 ‘여성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집을 나서기 전에 화장을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완벽하게 가꾸고, 자식의 교육을 관리하면서 남편의 사소한 일상을 책임지는 것. 초능력이 구할 수 없는 그들의 ‘여성’으로서의 일상이다. 작가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표현방식과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를 빌려 관객에게 쉽고 유머러스하게 다가가지만, 각 캐릭터들을 이용해 세대별 여성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을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맺으며

오직 한 사람의 힘으로 기획되고 실행되는 아트페어, 한국여성아트페어는 2018년 5월에 개최된 <제 1회 한국여성아트페어 : 여성이 여성을 되찾다>를 시작으로 9개월 만에 2회를 맞이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아트페어. 이혜라 디렉터는 남성에게 지배당해온 아트페어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되찾아와 여성 작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해당 기획을 시작했고, 그 결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화하는 열여섯 여성 작가들이 모여 이 자리에서 함께 공명하고 있다. ‘여성적 작품’이라는 허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남성중심사회에서 가부장적 시선으로 만들어지던 여성이라는 허상을 지우고 그 위에 진짜 여성의 이야기들을 덮어쓰기 위해.

KWAF x BOSS MARKET

이번 한국여성아트페어는 보스 마켓과 함께 열립니다.

행사명 : 제2회 한국여성아트페어 (Korea Woman Art Fair)
일 자 : 2019.01.26.(토) ~ 01.27.(일)
시 간 : 오전 11시 ~ 오후 5시 (입장가능시간)
장 소 : 세종대학교 광개토관 (세종컨벤션센터) 한국여성아트페어 - B1 갤러리
주 최 : 동동 출판사
주 관 : 한국여성아트페어

* 작가해설은 양일 모두 오후 3시, 한 타임씩만 진행됩니다 :)

* 여성 창작자, 여성 대표를 위한 박람회 <보스 마켓>  https://boss-market.weeb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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